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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유혹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쉬즈위안 / 김영문역
출판 : 글항아리 201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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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G2라든가 BRICs와 같은 신흥국가의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나라든 내부에 현정부나 과거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동조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흔히 폐쇄적인 국가일 것으로 생각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도 찬성과 동조의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많다는 점이 놀랍다. 물론 이집트나 리비아 등의 정권이 무너지는 사례들을 통해서 국민 개개인의 힘이 모였을 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되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중국도 충분히 다양한 시각들을 가진 국민들의 의견이 표출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동안 티벳과 같은 중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나 집단적인 반발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있지만 그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인데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새로운 중국의 모습이다.



얼마전 랑셴핑이 저술한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라는 책을 읽고 누구나 생각해왔던 중국의 발전해 가는 모습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내부 전문가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 <독재의 유혹>저자인 쉬즈위안의 경우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랑셴핑의 저술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국한되어 있다면 이 책은 다소 광범위하게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의 한계에 대해 상당히 소상히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중국의 발전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중국의 이미지는 더욱 강력하고 선진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발전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발전지향주의에는 그 밖의 문제들은 은폐되고 부패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국가는 오직 발전을 통해서만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자연스러운 합법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그 국가의 기타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든 간에 저절로 은폐될 수 밖에 없다. (중략) 그리하여 끊임없이 단순화되는 발전주의의 신념 속에서 GDP 성장은 중국인들에게 현란한 영광을 선사해 주었다.  - p.36

 

책의 초반부에서는 중국의 성장만 바라보고 그 성장의 이면에 감추어진 모습에 대해 외면하는 여러 학자들과 그들의 저술들을 소개하고 있다. 존 나이스빗, 조슈아 라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공적인 중국의 모습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베이징 컨센서스란 중국은 자체적으로 독특한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만들었고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시스템이라는 것(p.29)이며, 더 나아가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정치적 성공으로 연결(p.41)되어 '메가트렌드 차이나'에 걸맞는 위상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실제 중국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만약 중국에서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관리들이 민주, 자유, 실사구시,창신(創新) 등과 관련된 주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마음은 이런 어휘의 진정한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호, 표어, 공문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다르고 있다. - p.33

 

너무나 신랄하고 파격적인 비판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비판한 중국의 모습은 또한 정치권력의 부패, 국유기업의 붕괴, 타이완 및 홍콩과의 마찰, 미국과의 긴장관계 등으로 인해 앞날이 불투명해진 중국(p.32)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왜곡된 시각을 과거 소련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한다. 앙드레 지드는 소련을 방문하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희망을 가득채워준다'고 하였고, 영국의 웹 부부는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일종의 신문명이라고 공언하였다(p.46). 이러한 논조는 소련은 1917년 혁명 이후 계획체제를 창조하여 사회의 부를 통일적으로 분배하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미국은 대공황 이후이 쇄락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가 정치, 경제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로 빠져들자 소련의 집체주의와 평등사상이 참신해 보였기 때문에 등장했지만 정작 자본주의의 소외현상은 질책하면서도 소련이 저지른 갖가지 악행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p.45). 하지만 저자는 그들이 바라보았던 왜곡된 소련의 진실은 '발전 수준이 저급한 슈퍼 대국'에 불과하다(p.52)고 평한다.

 

소련은 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고 말했지만, 관료 시스템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전면적인 인간 해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소련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고 호언장단했지만 사실은 드넓은 황무지를 창조했을 뿐이었다.  - p.52

 

이러한 소련이 발산한 빛이 항성과 같았다고 한다면 베트남이나 쿠바 등에서 등장한 공산정권의 빛은 행성에 불과하여 미약했다. 이 소련이 빛을 잃어가자 그 대체자로서 가장 기대치가 높았던 나라는 바로 마오쩌둥의 중국(p.54)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왜곡된 모습을 가졌던 소련이 몰락해 갔던 것처럼 중국 역시 그런 수순을 밣지 않겠느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이런 심각한 주장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13억 시장을 보유한 황금국이며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라는 인식은 상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상상 속에서 기본적인 가치 판단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오점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상속의 중국은 1930년대 소련의 또다른 판박이(p.58)일 뿐이다.

 

저자는 비판적 시각은 벨기에 학자인 '시몬 레이스'의 주장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시몬 레이스는 문화대혁명이 '세계에서 가장 총명한 인민을 바보로 타락시키는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평가(p.62)했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압제가 심한 나라라는 판단(p.61)을 내린 사람이다. 저자의 생각도 이와 동일하다. 대부분의 중국인이 숭배하고 추앙하는 마오쩌둥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저자는 서슴지 않는다. 저자의 판단으로 마오쩌둥의 지상 최대의 방종의 인물이었고, 그 방종을 제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p.84). 그는 야만적인 몽상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오류들을 현대의 중국인들을 보고도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으로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시대에 관한 반성이 시작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이나 레닌을 부정하는 것과는 차별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련이 고르바초프의 '공개적인 정책'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처럼 갈수록 많은 비밀과 잔혹한 기억이 풀려나올 때 그것들은 해일과 같은 역량으로 현실을 뒤덮을 것이다(p.88). 중국은 이점을 교훈으로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독재적 권력은 외부의 제어장치도 없었고 내면의 반성도 부족했다(p.90).

 

몇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쑹훙빙의 <화폐전쟁>에 대해서도 저자는 놀라울 정도로 강도높은 비판을 한다. 저자는 쑹훙빙을 '아마추어 역사학자(p.101)'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으며, 그가 쓴 <화폐전쟁>은 '황당한 책(p.107)'이라고 조롱한다. 반면 랑셴핑은 '제대로 경제를 공부한 사람'으로 격상시킨다. 랑셴핑은 앞서 언급했던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와 함께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 <누가 중국경제를 죽이는가> 등의 저자이며 그 이외에도 최근 1~2년 사이에 그의 많은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중국의 경제시스템은 '서구 자본주의'보다 더욱 잔혹한 자본주의(p.145)를 추구한다. 중국의 국민들은 정부의 권력과 시장 권력이라는 이중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정책에 희생된 개인은 보지않고 추상적인 위대함으로 모든 것을 저울질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마오쩌둥의 개인적인 매력, 두 자리 숫자의 경제 성장, 공산당의 절대 권력,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국 모델'이라는 놀라운 이론이 모든 것을 저울질하는 표준이라고 분석한다. 수천만 명의 사망과 생생한 개인 비극은 아주 짧은 언급에 그치고 있다.  - p.145

 

따라서 중국의 유일한 목적은 서구 자본주의의 패권에 도전하여 그들 이론 창조자의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것일 뿐(p.147)이라고 저자는 일축한다. 중국인들의 진실한 생활과 중국 사회의 보편적인 곤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한다. 중국은 정치적이나 문화적 측면에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특수성이 왜곡되고 과정되어 특수한 경험으로 보편적 경험을 은폐하게 되면 중국 사회는 결국 위험에 빠지게 될 것(p.149)이라는 저자의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가져왔다. 다만 중국을 너무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경계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그들만의 독특한 특수성의 문화가 성공모델이 될지 실패모델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G2가 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기 때문이다.

Posted by 테크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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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내부의 적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 김지현역
출판 : 반비 201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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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이슈에 이어 민주주의 자체도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책이다. 민주주의는 용어 자체의 의미에서처럼 국민이 권력을 갖는 체제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미리 정한 기간 동안 법을 제정하고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한다(p.13). 저자는 이러한 지적을 하기에 앞서 본인은 인생의 1/3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머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낸 경험을 책에서 풀어놓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포퓰리즘, 극단적인 자유주의, 메시아주의 등이다. 즉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인 인민, 자유, 진보 중 어느 하나가 적정선을 넘어 유일한 원칙임을 자처할 때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고 한다.


책의 주제를 다루기 전에 1600여 년 전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권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대표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주된 예로 들고 있다. 논쟁의 주제는 '자유의지'와 '죄와 구원'의 문제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죄는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선조의 행동을 모방한 결과라고 말한다. 즉 신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죄를 짓고 안짓고의 문제는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 자기통제와 정신력을 배우며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능력을 낙관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았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고 오직 자신만을 탓할 수 있을 뿐이다(p.26).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의지의 결과라고만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원죄는 인간 종에 속한 모든 개체 특유의 결핍과 취약점인데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한 근본적인 결함이라는 주장을 한다(p.28). 원죄로 가득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기대야 한다(p.29)는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418년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이단 선고를 받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지만 그 이후 이 논쟁의 불시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이후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어느 쪽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 이후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개인의 운명(도덕)보다 사회의 운명(정치)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논쟁에서 정치적 행위와 권력자들이나 대중에 대한 담론으로 이행한다(p.40). 대중들이 요구가 폭발하기 전에 몽티스키외의 중용의 태도는 마르퀴드 콩도르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격렬하게 비판받는다. 콩도르세는 필라기우스의 사상과 유사하게 인간이 법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지상의 악을 일소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완성하고 능력을 펼치게 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원죄는 제거해야 할 미신일 뿐이며 행복은 사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논의가 급진전되어 더 나아가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내세우면서 특유의 궁극적인 목표와 이에 이르는 특별한 방법(혁명과 공포정치)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정치적 메시아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콩도르세의 사상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움직인 결과이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 첫번째 단계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에 헉명전쟁과 식민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며, 두번째 흐름은 공산주의으로, 세번째 흐름은 민주주의로 나타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예상했던 바와 같다. 즉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서방 선진국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모든 악이 선의 이름으로 실현되고 숭고한 목적이라며 정당화되는 역설이라는 것이다. 선을 추구하지만 그 선은 결국 과거의 종교를 대체하고 있을 뿐 큰 차이는 없으며 나만이 선하다는 주장으로 인해 전쟁을 선포하고 다른 나라 국민들의 인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오만함과 헛된 욕망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국제 정치에 복무하는 도덕과 정의는 도리어 도덕과 정의를 해치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강대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위선적인 장막으로 나타난다.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메시아주의 정치는 서로를 파괴한다. "천사가 되려고 하다가 짐승이 된다."라는 파스칼의 문구가 이런 상황을 더없이 잘 설명해 준다. 일군의 국가가 다른 국가에 자신들의 의지를 무조건 관철하는 이상, 국제질서는 개선되지 않는다.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추되고 심지어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국가에서조차 민주주의 원칙이 부식될 위험이 있다.  - p.90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신자유주의로 넘어간다. 국가의 활동은 공공질서 유지 정도로 최소화되어야 하며 최소화되어야 하는 것은 경제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연결된다. "부를 제한"하거나, "공정하게 분배"해서도, 심지어 "과도한 부의 추구를 막아서도" 안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입장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냥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자유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좌파는 검열, 금기, 도덕 등 행동에 최대한 자유를 부여하되 경제적 자유는 국가가 제한해야 한다고 하며, 우파의 경우는 이와 반대의 주장을 한다. 두가지 자유를 모두 추구할 수는 없으며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이슈라는 점을 지적한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지나치게 통제를 해서 비판을 받았는데 신자유주의는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다시피 지나친 방임이 낳은 결과로 재분배가 되지 않는 현상을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계급의 소멸을 위한 투쟁 대신 이익의 조화를 가정한 뒤 시장의 자연법칙에 의존하는 역사법칙에 찬성한다. 여기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 짧게나마 되돌아 보게 한다. 적당한 통제와 적당한 자유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저자도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행태를 "야만화"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비판을 마무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도를 넘어선 나머지 탈이 났다(p.199)고까지 표현한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위험요소가 눈에 띄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퓰리즘으로 치달을지 아직 결말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데 해답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한다. 


역사가 불변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미래가 의지에 달려있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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