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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을 배척하는 일,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그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세상을 불평등하며 이 불평등을 조장하는 세력들을 문제시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도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공격대상을 만들어내고 반대세력들은 이 기득권 세력으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대중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이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저자인 이안 브레머의 책은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리더가 사라진 세계>, <팻테일>, <J커브> 등우리나라에서 다수 번역 출간되어 있다. 모두 글로벌 정치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책들이다. <우리 대 그들>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가들에 의해 조장되는 갈등과 분노에 대해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재주가 있어 모범 시민이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권력을 등에 업은 도둑, 혹은 탐욕에 눈이 먼 도둑에게 맞서야 한다는 분열의 이미지를 그럴싸하게 제시하면서 '우리 대 그들'의 구도를 만든다.  - p.13


이러한 갈등과 분노는 국가와 국가간에도 벌어지지만 한국 독자들이 좀더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바로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좌파 대 우파의 이데올로기즘 대결구조를 비롯하여 남성 대 여성의 성대결구조,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간의 갈등,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의 차별의 문제, 도시와 지방의 혜택 차별에 대한 분노 등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 누군가 이 갈등의 조장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쟁취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3장에서 열두개 나라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소개하면서 다음 문장을 보면 '우리 대 그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엘리트 지도층이거나, 경찰이나 백인, 외국인 투자자일 수도 있고,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일 수도 있다. 혹은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등에서 유입되는 반갑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다.  - p.99


저자는 남아공을 비롯하여 나이지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터키, 러디아,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대 그들'의 갈등을 소개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세계화를 받아들인 청년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청년들도 있기에 젊은 세대가 어린 나이부터 자유냐, 교리준수냐 하는 문제를 놓고 양분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만약에 왕실의 야심가들이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집권층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려 들면서 불협화암을 만든다면 사우디인들은 '우리'를 규합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내려 할 것이고, 그에 따라 같은 중동 지역의 라이벌 국가인 이란과 더 많은 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p.116)고 주장한다. 이는 한 나라에서 '우리'의 세력 확장을 위해 외부에 있는 '그들'을 내세울 수도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일반 국민이 정재계 엘리트 층 전체와 맞서는 구도로 '우리 대 그들'의 전개되고 있다(p.118). 터키에서는 나아라 어렵고 비판이 고조되는 시국에 에르도안은 '우리 대 그들'의 정치에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는 정적, 언론인, 쿠르드족을 무시하고, 보수적인 이슬람교인과 골수 국수주의자들이 주를 이루는 지지자들의 불만에 장단을 맞춰 유럽의 정부를 향해 노골적으로 싸움을 걸고 있다(p.129). 인도에서는 집권 여당인 BJP의 정치 관료들이 힌드교 국수주의를 비판하는 언론인들을 '더러운 세속주의자', '언론의 창녀'로 매도하는 등의 수법으로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다(p.138). 


국가와 국가간에 세워지는 유무형의 장벽을 통한 정보의 통제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국가 내부에도 이러한 장벽을 세움으로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거나 또는 반대로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기득권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앞으로 훨씬 많은 나라의 정부가 자신들을 '그들'로부터 지켜줄 사람들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은근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법에 수정을 가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 p.183


투표를 원천 봉쇄할 수는 없어도 더 어렵게 만들 수는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투표를 위해 구비해야 하는 서류의 수를 늘리고, ㅌ표 대기열을 길레 늘릴 방안을 마련하고, 특정 유권자들의 의지를 꺾을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다.  - p.191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모두 적폐로 돌리고 이를 청산하지 않으면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 없다는 표퓰리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적폐 청산이라는 좋은 비전을 내세웠지만 정작 기존의 적폐들이 벌였던 불법을 여전히 자신들이 권력 쟁취 및 유지를 위해 사용했음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더욱 조장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댓글 조작, 가짜뉴스 등 사이비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여론을 조작하려는 움직임은 지금까지 그 어떤 정부에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며, 이를 통해 '그들'의 세력을 누르고 '우리'의 권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현상이 맞서기 위해 창의성을 가지고 더 똑똑하게 분별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더이상 똑같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됨을 저자는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인간은 타고난 창의성으로 생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낸다.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갈 방법을 새로이 마련해야 한다(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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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테크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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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내부의 적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 김지현역
출판 : 반비 201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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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이슈에 이어 민주주의 자체도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책이다. 민주주의는 용어 자체의 의미에서처럼 국민이 권력을 갖는 체제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미리 정한 기간 동안 법을 제정하고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한다(p.13). 저자는 이러한 지적을 하기에 앞서 본인은 인생의 1/3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머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낸 경험을 책에서 풀어놓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포퓰리즘, 극단적인 자유주의, 메시아주의 등이다. 즉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인 인민, 자유, 진보 중 어느 하나가 적정선을 넘어 유일한 원칙임을 자처할 때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고 한다.


책의 주제를 다루기 전에 1600여 년 전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권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대표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주된 예로 들고 있다. 논쟁의 주제는 '자유의지'와 '죄와 구원'의 문제였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죄는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선조의 행동을 모방한 결과라고 말한다. 즉 신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죄를 짓고 안짓고의 문제는 인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 자기통제와 정신력을 배우며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능력을 낙관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았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고 오직 자신만을 탓할 수 있을 뿐이다(p.26).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의지의 결과라고만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원죄는 인간 종에 속한 모든 개체 특유의 결핍과 취약점인데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한 근본적인 결함이라는 주장을 한다(p.28). 원죄로 가득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기대야 한다(p.29)는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418년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이 이단 선고를 받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지만 그 이후 이 논쟁의 불시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 이후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어느 쪽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 이후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개인의 운명(도덕)보다 사회의 운명(정치)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의 논쟁에서 정치적 행위와 권력자들이나 대중에 대한 담론으로 이행한다(p.40). 대중들이 요구가 폭발하기 전에 몽티스키외의 중용의 태도는 마르퀴드 콩도르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격렬하게 비판받는다. 콩도르세는 필라기우스의 사상과 유사하게 인간이 법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지상의 악을 일소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완성하고 능력을 펼치게 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원죄는 제거해야 할 미신일 뿐이며 행복은 사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논의가 급진전되어 더 나아가서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내세우면서 특유의 궁극적인 목표와 이에 이르는 특별한 방법(혁명과 공포정치)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정치적 메시아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콩도르세의 사상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움직인 결과이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 첫번째 단계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에 헉명전쟁과 식민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며, 두번째 흐름은 공산주의으로, 세번째 흐름은 민주주의로 나타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예상했던 바와 같다. 즉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서방 선진국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모든 악이 선의 이름으로 실현되고 숭고한 목적이라며 정당화되는 역설이라는 것이다. 선을 추구하지만 그 선은 결국 과거의 종교를 대체하고 있을 뿐 큰 차이는 없으며 나만이 선하다는 주장으로 인해 전쟁을 선포하고 다른 나라 국민들의 인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오만함과 헛된 욕망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국제 정치에 복무하는 도덕과 정의는 도리어 도덕과 정의를 해치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강대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위선적인 장막으로 나타난다.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메시아주의 정치는 서로를 파괴한다. "천사가 되려고 하다가 짐승이 된다."라는 파스칼의 문구가 이런 상황을 더없이 잘 설명해 준다. 일군의 국가가 다른 국가에 자신들의 의지를 무조건 관철하는 이상, 국제질서는 개선되지 않는다.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추되고 심지어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국가에서조차 민주주의 원칙이 부식될 위험이 있다.  - p.90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신자유주의로 넘어간다. 국가의 활동은 공공질서 유지 정도로 최소화되어야 하며 최소화되어야 하는 것은 경제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연결된다. "부를 제한"하거나, "공정하게 분배"해서도, 심지어 "과도한 부의 추구를 막아서도" 안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입장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냥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자유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좌파는 검열, 금기, 도덕 등 행동에 최대한 자유를 부여하되 경제적 자유는 국가가 제한해야 한다고 하며, 우파의 경우는 이와 반대의 주장을 한다. 두가지 자유를 모두 추구할 수는 없으며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이슈라는 점을 지적한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지나치게 통제를 해서 비판을 받았는데 신자유주의는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다시피 지나친 방임이 낳은 결과로 재분배가 되지 않는 현상을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계급의 소멸을 위한 투쟁 대신 이익의 조화를 가정한 뒤 시장의 자연법칙에 의존하는 역사법칙에 찬성한다. 여기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으로 짧게나마 되돌아 보게 한다. 적당한 통제와 적당한 자유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저자도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행태를 "야만화"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비판을 마무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도를 넘어선 나머지 탈이 났다(p.199)고까지 표현한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위험요소가 눈에 띄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퓰리즘으로 치달을지 아직 결말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데 해답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한다. 


역사가 불변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미래가 의지에 달려있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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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테크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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