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살바도르 달리, 이마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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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은, 또는 제목만이라도 들어봤던 책 중에서 가장 유별난 제목의 책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자서전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세계의 배꼽이라니. 책 표지에는 ‘이상한’이라는 단어로 이 자서전을 수식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한 자서전이다. 유별난 제목만큼이나 내용 역시 ‘기가막힌’ 사연들로 가득차 있다.
책의 외형적인 모습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자서전 답게 기존의 단행본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 흔적이 보인다. 본문 텍스트는 주요 문장의 폰트와 컬러를 주어 강조하였고, 판형도 일반 단행본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사이즈이다.
그림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나로서는 달리의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었고 몇 개의 그림들 중에 흐느적거리는 시계 그림은 많이 익숙한 작품이었다. 나는 그런 그림을 봐도 ‘멋있다’ 라든가 ‘잘그렸다’는 느낌보다는, 좋게 말해서 ‘참 상상력이 뛰어나구나’, 안 좋게 이야기해서 ‘별 희한한 그림도 다 있군’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가는 순간 왜 달리가 그런 ‘이상하고 희한한’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괴짜’ 천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후한 점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녔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책은 시작한다. 5세 때 다리 밑 4미터 아래로 꼬마를 밀어서 사고를 내고도 죄책감을 안느꼈다는 이야기, 집에 방문한 의사선생님의 얼굴을 먼지털이로 후려쳐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또 세 살짜리 여동생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찼던 6세 시절의 이야기, 박쥐를 입으로 물어뜯어 반토막을 낸 이야기... 이건 정말 ‘황당’의 수준을 넘어 정신상태를 의심해 봐야하는 사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에서 여덟 살까지 나는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가서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의 기억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서... - p.69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고백을 보고 있자니 동정심마저도 들었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달리는 자신을 ‘천재’라고 표현했지만 이게 천재라면 난 천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요즘 표현으로 ‘왕따’를 당했던 학창시절도 그에게는 추억거리였는가보다. 학교 내에서 비정상적이거나 특이한 일은 달리의 소행으로 간주되었고 혼자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달리는 고독을 즐기고 더 나아가서 과시하기에 이르렀다(p.151)고 표현한다. 메뚜기를 보고 공포심을 느꼈다는 대목에서는 공감이 가기도 했다. 나 역시 자연친화적인 환경(쉽게 이야기해서 촌)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없어서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벌레’ 종류는 전부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지금도 바퀴벌레는 잘 못잡는다(ㅠ). 하지만 달리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공포심을 느끼는 모습이 어린 시절 동생 머리를 발로 걷어차는 등 만행을 저질렀던 달리와는 좀 다른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이 넘치는 기괴한 그림들을 그리는 달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 자서전을 쓰고 있었을 달리를 상상해 본다. 다시 천재와 미치광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결국 이 둘은 직선관계의 양극단이 아니라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는 원위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문장이 쉽게 읽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인지 원문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산책을 ‘산보’라는 일본식 표현으로 번역한 점도 눈이 좀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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