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인 조반의 아들 조서로와 이귀산의 처 유씨와의 간통사건을 근거로 하여 상상력을 펼친 결과로 만들어졌다. 세종은 유씨의 사형을 집행하였으나 추후 자신의 형벌이 과했다는 점을 자인하였다 하니 이들의 사랑이 소설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충분한 상상력의 발원지가 된 듯 하다.
당신의 상황은 숭불정책을 취했던 고려가 무너지고 숭유억불정책으로 국시를 삼았던 조선이 건국되어 기틀이 잡히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당시의 간통이라는 것이 지금의 간통보다는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주요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화당의 나라와 녹주의 나라는 확연히 달랐다. 새 나라의 기틀이 잡혀갈수록 그를 벗어난 것들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다.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처벌이 불가결했다. 하지만 죄가 같다 해도 벌은 달랐다. 서로는 권력의 가까이에 있었기에 그 속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제나 표적이 되는 것은 더 악한 죄인이 아니라 더 약한 희생양임을. - p.287
정치적 권력의 희생양으로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한 여자아이가 먼 친척뻘되는 할머니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자아이는 부모가 불에 타 죽고 혼자 살아남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에서 지웠다. 할머니의 손자인 한 남자아이가 같이 살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 여자아이가 마음에 들어 푸른 구슬이라는 뜻의 '녹주'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남자아이의 아버지는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일조한 탓에 후일 개국공신의 칭호를 받게 되는 조반이다. 조반의 아들 조서로는 이렇게 녹주라고 이름붙인 여자아이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조서로의 어머니는 그 여자아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왕조가 바뀌어 개성에서 살던 조씨 집안은 개성에서 조선의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어머니는 녹주를 외딴 절로 보내고 자신들만 이주하는 바람에 서로와 녹주는 헤어지게 된다. 녹주는 그 절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를 잊지못해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눅주는 절에 기거하던 중에 이귀산이라는, 대략 녹주보다 20세 이상 많은 남자를 만나 후처로 혼인관계에 이르게 되고 우연히 그 사실을 서로가 듣게 된다. 녹주와 서로는 오랜 시절을 따로 보낸 후에 다시 만나게 되고 사랑을 열매를 맺으려 한다.
그 사랑의 열매가 무엇이었는지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세종실록 21권 세종5년(1423년) 9월 25일의 첫번째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소설 속의 녹주는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법 바깥에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법이 나를 마땅히 죽여야 할 죄인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니 법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을 터입니다. 사람이 있다면 어김없이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도와 제도보다는 사랑이 먼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죄는 다만 순연히 그 순서를 따른 것뿐입니다. - p.334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다. 녹주와 혼인했던 이귀산은 사랑했던 부인을 먼저 보내고 슬픔 속에 빠져있다가 녹주를 만나게 된다. "무릇 사람들은 슬픔 그 자체로 미치지 않는다. 슬픔은 가슴을 갈가리 찢고 영혼을 너덜너덜하게 헤집지만, 그것이 터져 나와 흘러넘치는 순간 독성을 사라진다.(p.214)" 저자는 사람의 슬픔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하지만 이귀산은 그럴 여력조차 없었던 슬픔속에 빠져있었다. 녹주가 암자에서 지낼 때 운공스님이 녹주의 마음 속을 꿰뚤어보고 한 말도 인상적이다. "불행과 경쟁하지 마라.(p.199)" "불행과 경쟁하노라면, 너도 모르게 이기고 싶어질 것이다. 설령 그 승리의 조건이 더 큰 불행일지라도.(p.200)"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새드엔딩으로 끝나게 되었던 원인을 여럿 찾을 수 있곘지만 서로의 어머니와 청화당(서로의 외할머니)과의 관계가 그대로 아들 서로에게까지 전달된 것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인 청화당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서로 역시 자신의 어머니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나를 한번이라도 사랑했소? 진심으로 아끼고 어엿비 여겼소?" [서로의 어머니가 죽기 전의 청화당에게 한 말] - p.97
"어머니, 단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소자를 어엿비 여긴 적이 있으셨습니까?" [서로가 죽기 직전의 어머니에게 한 말] - p.264
이 부분이 이 간통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한편의 소설로 만들어내기까지 작가가 가장 공들인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화당에서부터 자신의 딸인 서로의 어머니, 그리고 서로에게 이어지는 잘못된 내리사랑이 없었다면 이 소설의 스토리텔링은 그다지 탄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 그것이 목마릅니다. 어머니가 한 번도 양껏 주시지 않았던 사랑말입니다!"
끝내 마음 밑바닥의 말을 토하며 서로는 통곡했다. 결국엔 그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학대한 까닭도 사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한 채 자라난 아들은 끝내 갈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p.268
나는 흥미롭게 읽었으나 전문가가 아니므로 문학작품의 수준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근데 소설은 정말 가끔 읽어줄 필요가 있다는 걸 이 책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스토리의 재미라든가 작품성을 논하기는 힘들지만 처음 20여 페이지 안에 내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온다. 작패하다, 겅더리되다, 들놀다, 잡도리하다 같은 동사나 올차다, 날큰하다, 돌올하다, 푸새하다 같은 형용사를 비롯하여 피칠갑, 갈피짬, 얼뚱아기, 잔짐승, 몸피, 쟁기고기, 딸따니, 결찌, 어마지두 같은 명사들은 대부분 처음 듣는 단어들이다. 평소 자주 쓰는 말은 아니더라도 내가 한국사람이 맞았나 싶을 정도다. 내 한글 실력은 이 정도였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의 상상력에도 놀랍다. 지금 막 읽기를 마친 '김별아'의 미친 상상력은 더더욱 더.